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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 flow, 미하이칙센트미하이

by 해뜰시간 2021.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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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우연히 찾아오지 않는다."

행복은 우리 외부에 있는 요인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외부적 요인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달려있다.

P27 실제로 행복은 우리가 준비해야 하고, 마음속에서 키워가야 하며,

사라지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스스로 지켜내기도 해야 하는 특별한 것이다.

즉 자기 내면의 경험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삶의 질을 결정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P30 플로우는 사람들이 다른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을 정도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푹 빠져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이런 경험 자체가 너무나 즐겁기 때문에 이 상태를 지속하기 위하여 어지간한 고생도 감내하면서 그 행위를 하게 되는 상태이다.

자신을 사회적 통제에서 해방시키는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바로 삶의 순간순간마다 주어지는 보상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경험의 흐름에서 주어지는 의미를 발견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사회적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보상을 자신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면 그동안 사회에 맡겨두었던 자신의 힘을 되찾을 수 있다.

P77 우리의 의식상에 무엇이 떠오르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주의인 까닭에, 또한 우리가 기억하고, 사고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데 주의가 필요한 까닭에 주의를 심리 에너지라고 생각해도 좋다. 주의를 에너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주의 없이는 일할 수 없으며, 또한 일을 하다 보면 주의가 점점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스스로를 창조해나간다. 그리고 이 에너지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활용할 수가 있다. 즉 주의는 경험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가장 유용한 도구인 것이다.

P88 최적 경험이란 의식이 질서 있게 구성되고, 또한 자아를 방어해야 하는 외적 위협이 없기 때문에 주의가 오로지 목표 달성만을 위해 자유롭게 사용되는 상태를 말한다.

P90 복합성complexity이라는 것은 두 가지 심리적 과정을 거친 결과인데, 이 두 가지 과정을 각각 분화differentiation와 통합integration이라고 부른다. 분화라는 것은 자신을 유일하고 고유한 존재로 여기며 나아가려는 움직임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서 분리하려고 하는 경향을 말한다.

한편 통합이라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로, 다른 사람이나 다른 아이디어와 합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복합적 자아란 이 두 가지 경향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자아를 일컫는다. 분화만 되고 통합되지 못한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큰 성취를 이룰 수 있겠지만 자칫 지나친 이기주의에 빠지기 쉽다.

반대로 통합만 되고 분화되지 못한 자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소속감과 안전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자율적인 개성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직 한 개인이 자신의 심리적 에너지를 분화와 통합이라는 이 두 가지 과정에 균등하게 분배할 때, 또한 그 결과 지나치게 이기적이거나 순응적이지 않게 될 때 그 사람의 자아는 복합성을 갖추게 된다.

P122 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통제되는 상황 속에 존재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서 스스로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타성에 박힌 일상의 안전함을 포기하지 않고는 진정한 통제감을 경험할 수 없다. 결과의 성공 여부가 불확실하고 자신이 그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때만 진정 자신이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P167 의식에서 사건을 표상하기 위해서 단지 몇 가지 외적 단서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환경의 영향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주의력을 융통성 있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외적 경험을 머릿속에 쉽게 표현하고, 그 결과 더욱 자주 최적 경험에 도달하게 된다.

P170 목표와 피드백의 명료한 제시, 통제감, 당면한 과제에 대한 집중, 내적 동기화, 그리고 도전 의식을 독려하는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은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과 비교해볼 때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더 나은 기회를 갖는다.

P187 즐거움이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바로

그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의 여부에 따르는 것이다.

P227 그러나 의식의 통제를 최소한 문제 해결 능력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복잡한 양식의 정보를 암기하는 건 결코 헛수고라고 할 수 없다. 지속 가능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정신이 그렇지 않은 정신보다 훨씬 더 풍부하기 때문이다. 창의성과 기계적 암기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내적 상징체계가 없는 사람은 너무 쉽게 대중매체의 포로가 된다. 이런 사람들은 선동 정치가에게 쉽게 현혹되며, 연예인을 보고 금세 기분이 풀리고, 장사꾼들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마약, 유창한 정치적 구호나 종교적 구원에 의존하게 되는 건 의지할 것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즉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방지해 줄 내적 규칙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P235 스스로 정보를 제공할 능력이 없을 때 우리의 생각은 무질서로 흘러 들어간다. 의식의 질서를 찾기 위해 자신이 아무런 통제도 할 수 없는 외부의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기술과 지식으로 자생적으로 성장하는 내적 방법을 따를 것인가의 여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P242 에릭슨은 인간 발달의 마지막 단계는 '고결성'을 달성하는 과정인데 이는 한 사람이 일생을 통해서 성취한 것과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의미심장한 자신만의 이야기로 정리하는 일이라고 했다. 과거의 기록을 보관하는 행위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 과거의 추억은 우리를 현실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의식이 지나간 시간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과거는 기억 속에서 결코 완전한 사실이 될 수는 없다. 기억은 계속해서 재편집되는 것이며, 다만 우리가 그 편집 과정을 창의적으로 통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P253 전문화는 그게 어떠한 사상이든 사고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 여기서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분명하게 해야 하겠다. 즉 전문화는 한층 더 깊은 사고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진지한 사상가가 자신의 모든 정신적 노력을 투자해 명망 있는 학자가 되지만, 그 과정에서 학자가 되고자 했던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고 만다.

P290 스트레스와 압력은 직업에 따르는 가장 주관적인 측면이므로 그만큼 의식의 통제를 받기 쉽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스트레스는 우리가 그것을 느껴야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완전히 지쳐버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상황을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P314 고독에 대처하는 '자세'에서 큰 차이가 발생한다. 혼자 있는 상황을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할 수 없는 목표를 성취하는 기회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고독을 즐기게 된다. 또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도 있다. 반면 고독을 하나의 기회로 보지 않고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해야만 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보는 사람은 그런 상황에 처하면 당황하기 일쑤일 것이다.

P330 공동의 목표가 있고, 의사소통의 채널이 항상 열려있는 가정, 또한 신뢰가 바탕이 되는 환경 속에서 점차 확대되는 활동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가정이 될 때, 그 가정 안에서의 생활은 즐거운 플로우 활동이 된다. 이런 가정의 구성원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주의를 그룹의 관계에 집중하게 된다.

별도의 의식을 하나의 통합된 목표로 결속시켜주는 복합적인 체계에 소속되는 즐거움을 경험하기 위해 개별적 자아나 개개인의 다양한 목표를 어느 정도까지는 잊을 수 있게 된다. … 집중하지 않으면 복합적 활동은 곧 와해되고, 남는 건 혼란뿐이다. 어찌 가정이라고 해서 이와 같이 않겠는가? 무제한적 관심의 투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무조건적인 수용, 가족 간의 완전한 신뢰가 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모든 게 그저 공허한 몸짓일 뿐이며, 무관심과 별 차이가 없는 위선적인 허식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자기 목적적 자아'라는 용어는 글자 그대로 '스스로 만들어낸 목적이 있는 자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자아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목표를 상대적으로 덜 갖고 있다. 대부분 사람이 갖는 목표는 생물학적 욕구와 사회적 통념에 의해 형성되므로, 이는 자기 자아에서 발현된 목표가 아닌 것이다. (371p)

P399 선택의 여지가 풍부해지면서 오늘날 우리는 불과 백 년 전만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개인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 비슷한 매력이 있는 선택이 많아지면서 불가피하게 초래되는 결과는 목적이 불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결의를 약화시킨다. 그리고 약화된 결의는 결국 선택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러므로 자유가 많아진다고 해서 반드시 인생의 목적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고 하겠다.

P400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확실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각자가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스스로 찾아내야만 한다. 시행착오를 통해 그리고 집중적인 수련을 통해 우리는 서로 뒤얽혀 있는 목표들을 정돈할 수 있으며, 그 중에서 행동의 목적이 될 만한 것도 선택할 수 있다.

P417 이러한 사람들과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한 다른 많은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전략이 있다면, 그건 너무나 단순한 것이어서 언급하기조차 무색할 정도이다. 그 전략이란 옛 세대들이 만들어놓은 질서 속에서 자기 마음속의 혼란을 피할 수 있는 것을 추출해내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 속에는 이런 용도로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많은 지식, 다시 말해 잘 정돈된 정보들이 축적되어 있다. 누구나 위대한 음악, 건축, 미술, 시, 연극, 무용, 철학, 종교 등을 통해서 혼돈 속에서 조화를 창조해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이 지식을 간과해버리고 자신만의 기제로 삶의 의미를 창조해내고자 한다.

책을 읽은 후의 내 생각

FLOW

물이 막 흘러가는 것처럼 막힘없이, 거침없이 흘러가는 그런 상태.

이런 몰입이 어떻게 보면 행복의 가장 본질적인 형태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몰입의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운동이 됐든 예술 감상이 됐든)는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행복해질 수 있고 창조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실 감탄했던 것은 내가 막연하게 느껴왔던 부분을

너무나 명확하게 정리해놨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나고 재미있게 놀 때, 나 자신으로 완전히 흡수되어버린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는 평소에 주변을, 주위를 그리고 남을 의식하고 산다.

그런데 남을 의식한다는 것은 결국 남들이 내 삶의 주인,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거기에 맞춰 살게 되니까.

그런데 우리가 뭔가에 몰입하면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그때 비로소 내 안에 잠재되었던 무한한 능력이 솟구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막연히 해 왔는데, 이 책을 딱 읽으면서,

이 이야기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해서 굉장히 설득력 있게 이렇게 설명할 수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굉장히 강한 인상과 감동을 받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