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기쁨 -유병욱
깊이와 넓이
“나는 깊게 파기 위해서, 넓게 파기 시작했다.” -스피노자
땅을 판다고 다 깊게 들어가지지 않고, 잠시 파고들어갔다 싶은 땅도 다시 쉽게 메어진다.
어디가 깊게 들어갈 땅인지 모르니, 일단 ‘어느 곳이든’ 파보라는 겁니다.
깊게 파려면 일단 넓게 파봐야 하고, 그러다 보면 예상치 못한 어느 영역이 ‘쑥 내려가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 경험이 생각보다 짜릿하다는 걸 알게 되고, 그렇게 자신만의 깊이가 조금씩 생기는 거죠.
몇 번 땅이 쑥 내려가는 즐거움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생각의 땅 파기’ 팁을 드리면 ‘이러이러한 것이 좋다더라’하는 남들의 의견보다는 본인의 직관에 의지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유 없이 마음이 가는 것,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당겨온 것들에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살면서 내 안에 쌓인 결핍이라든지, 본능적으로 끌리는 취향 같은 것들이요. 이런 것들이 어느 순간 ‘땅 파기’의 무서운 동력이 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래서 남의 의견보단 내 생각!
충돌의 기쁨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 -안젤라 데이비스
‘성깔 있는 두부’ ‘두부’와 ‘성깔’이라니요. 당시에도 서로 잘 붙지 않는 단어였고, 그 이후에도 본 적 없는 만남입니다. 그래서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만난 적 없던 두 단어의 충돌에서 강력한 한 줄의 카피가 탄생하는 거죠.
‘진심이 짓는다’ 등 두 평범한 단어의 합으로도 상당한 힘을 가진 슬로건이 완성되는 거죠. 누구도 붙일 생각을 하지 않던 단어의 합이니까요.
*과제*
먼저, 자신에게 어떤 ‘벽’이 있는지 찾아봅니다. 그중에는 오랫동안 저 너머가 궁금했던, 하지만 두드려볼 ‘계기’가 없던 벽도 있을 겁니다. 벽이라고 해서 거창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화라는 장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마블 코믹스’도 벽으로 여겨질 테죠. 같은 맥락에서 재즈, 미술, 클래식, 운전면허, 종교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벽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디어를 잘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광고라는 업이 원가 ‘생각’에 특화되다 보니, 아이디어가 툭툭 나오는 비법이라도 있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당연히 비법은 없습니다. 다만 경험으로 얻은 약간의 팁은 있습니다. 낙차를 만드는 겁니다. ‘하던 대로’의 방식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겁니다. 매일 똑같은 상황에 놓인 나를 낯선 무언가와 일부러 충돌시켜보는 겁니다. <과감하고 뜬금없게>
거인의 어깨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떤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작 뉴턴
그토록 대단한 사람들도, 자신의 시대를 앞서 살아간 거인들을 따라 하고, 그들의 성취를 흡수하는 단계를 밟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것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평범한 우리들이 지금의 자신보다 조금 더 뛰어나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복사기가 되는 겁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하는 겁니다.
먼저 내가 관심을 갖고있는 영역의 거인들을 고릅니다. 그들 중에서도 내가 정말 비슷해지고 싶은 거인을 정합니다. 그런 다음엔 최선을 다해 그를 따라 하고, 흉내 내고, 흡수하는 겁니다. 가능하다면 거인의 근처로 가는 것이 가장 좋겠죠.
거인의 근처로 갈 수 없어도 방법은 있스비다. 그가 하는 작업과 그의 철학이 담긴 메시지들을 모아 나만의 공간에서 따라 하는겁니다. 마치 옆에서 배우는 것처럼 말이죠. 국립현대무용단을 이끄는 예술감독 안성수 씨의 인터뷰에서 이런 문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틀이 정립된 사람만이, 결국 틀을 깰 수 있다.’
기존의 틀을 파괴하는 대단한 업적도, 일단 틀을 만든 다음에나 가능하다는 겁니다. 일단 따라하는 거죠. 그렇게 천천히 ‘나’라는 뼈대를 세우고, 여기저기에서 떼어온 좋은 생각들과 노하우들을 붙여 살을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시간의 검증을 받겠죠.
내게 맞는 것들은 단단하게 뼈대에 붙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들, 내 능력 밖의 것들은 자연스럽게 뼈대에서 떨어져나가겠죠. 그 작업을 반복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누구인지 말하게 될 날이 올 겁니다.
만남과 성장
“인생은 결국, 어느 순간에 누구를 만나느냐다.” -유병욱
부모를 잘 만나야 한다거나, 배우자를 잘 만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인생’은 좀 더 좁은 의미입니다. 사람의 ‘생각’도 태어나고 자라서 성숙한다고 보면, 여기서 제가 말하는 인생이란 ‘생각의 인생’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던진 한마디가 머릿속에 깊숙이 박히고, 그것이 방향타가 되어 내각 생각하던 방향과 방식이 서서히 바뀌던 경험,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혼자사는 사람을 비유하는 문장
“냉장의 세계에서 본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부패한 것인가.”
이런 것도 또다른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게 함.
우리는 오늘도 수많은 ‘누구’를 만납니다.
사람인 ‘누구’를 만나고, 책과, 블로그와, 사진과, 그림과, 영화와 음악을 통해 ‘누구’를 만납니다.
그리고 누구를 만나는지 만큼 중요한 것은, ‘어느 순간’에 만나느냐입니다. 내가 얼마만큼 준비되어 있느냐에 따라 만남의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죠.
별 수 있나요? 무엇이든 최대한 많이 만나는 겁니다. 어떤 만남이 나를 변화시킬지는 불명확하지만, ‘만남이 있어야 성장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하니까요. 사람을 만나고, 영화를 만나고, 만화를 만나고, 책을 만나는 겁니다. 생각의 성장이 집중되는 인생의 어느 시점이라면 더더욱 그래야겠죠.